열두 소예언서 한 권으로 읽기

안소근 성서와함께

201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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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9-02-28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614g / 135 x 205
ISBN 9788976353412
책소개

열두 소예언서!! 분량이 적어서 소예언서라고 부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예언서 중에서도 분량이 많은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다니엘서를 제외한 나머지 열두 권을 모아 소예언서라 한다. 《이사야서 쉽게 읽기》를 쓴 안소근 수녀님이 이번에는 열두 소예언서를 한 권의 책에 간단히 정리하여 소개한다. 분량이 적다고 소홀히 여기고 스쳐 지나가기 쉬운 소예언서, 그러나 그 안에도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씀은 살아 있다.

 

열두 소예언서를 한 권 안에 정리하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드야, 요나, 미카, 나훔, 하바쿡, 스바니야, 하까이, 즈카르야, 말라키. 한번은 들어본 듯한 이름들이다. 또 성서를 읽으면서 분명 본 적은 있는 이름들이다. 그런데 막상 이 소예언서 각 권의 내용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분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열두 소예언서는 그렇게 약간은 낯선 책들이다. 짧아서 언제든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제대로 읽게 되지 않는 책들이다. 그래서 열두 소예언서를 한 권에 정리해 보았다. 열두 예언서 각 권의 저자, 저술 장소, 저술 시기, 문학 유형, 주요 내용 등을 알고, 각 예언서 본문에 담긴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열두 소예언자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열두 소예언서는 저자, 저술 장소, 저술 시기 등이 다르며 문학 유형도 다르고 주요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모든 소예언서 전체를 관통하는 예언의 내용은 ‘심판’과 ‘구원’이다. 정치적 혼란, 종교적·도덕적 타락, 외세의 침략 등으로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아무도 그것이 위기라고 느끼지 못할 때,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예언자들은 예민하게 위기 상황을 자각하고 ‘심판’을 예언한다. 그런데 아무도 그 예언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멸망에 이른다. 이번에는, 멸망을 겪은 후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에서 아무도 희망과 구원을 기대하지 않을 때,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예언자는 ‘구원’을 예언한다. 역시, 아무도 예언자의 말을 믿지 않는다. 이렇게, ‘심판’과 ‘구원’의 예언이 계속 반복된다.

 

집회서의 저자는 소예언서의 열두 예언자를 “야곱을 위로하고 / 굳센 희망으로 그들을 구원하였다”고 평한다.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언이 반복되지만, 궁극적으로 열두 소예언서가 전하는 것은 ‘위로·희망·구원’이다. 유배를 가기 전 위기 상황에서도, 유배지에서의 고통 속에서도, 그리고 귀향 후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도 예언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한결같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는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 메시지를 전하려고, 예언자들은 평탄하게 살 수 있는 삶을 뒤로한 채 험난한 예언자의 삶을 선택했으며, 자신조차도 믿고 싶지 않고 또 믿어지지도 않는 멸망을 선포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간절한 외침, 또 멸망 이후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는 주님의 날이 반드시 온다는 희망이 담긴 위로, 이것이 열두 소예언자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예언의 핵심이다.

 

여전히 세상은 어지럽고,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열두 소예언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하며,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책 속으로​

 

어느 시대에도, 예언자가 심판을 선고하든 구원을 선포하든 사람들은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언자의 말을 듣는 이들이 우리처럼 멀리서 바라볼 수 없었기에,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이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었고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더 큰 맥락을 파악할 수 없었기에 예언자들의 말은 늘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들어가는 말에서

 

예언자들이 그 시대의 사람들과 다른 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예언자들은 야곱을 위로하고 희망을 줄 수 있었을까요? 예언자들이 뛰어난 인물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느님 말씀이 그들 안에 살아 계셨기에 그들은 위로와 희망과 구원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순응함으로써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겪는 어둠 속에서도 멀리 비치는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들어가는 말에서

 

예언자들을 생각할 때 저는 어떤 고통스러운 신비를 느낍니다. 멸망을 선포해야 했던 예언자들도, 여러 세대가 지나고 나서야 겨우 그 의미가 조금씩 드러나게 될 하느님의 계획을 다 알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불확실함 속에서 멸망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멸망을 선포해야 했던 예언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럼, 멸망한 다음 그 깜깜한 현실을 보면서 구원을 선포해야 했던 유배 후의 예언자들은 또 어땠을까요? 그들에게도 하느님의 계획이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구원을 선포하면서도 그 구원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를 보여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기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외쳐야 했던 예언자들도, 자신들이 선포하고 있는 희망에 일말의 의심을 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예수님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라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들어가는 말에서

 

얼마 전 어떤 학생이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예언자들은 어떻게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인지 확신할 수 있었나요?” 정말 주님의 말씀임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선포할 수 있었을 텐데, 어디서 그런 확신을 얻었느냐는 의미입니다. 글쎄요,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이었습니다. 역으로는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들이 지닌 확신이 그 말씀이 그들의 것이 아님을 입증합니다.

76-77쪽

 

나훔서는 희생자의 편에서 읽어야 합니다. 나훔서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면 혹시 내가 승자 의 관점에서, 강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데 너무 길들여 있지 않은지 한 번쯤 반성해 볼 일입니다. 오늘도 세상 어디에선가 목소리 없는 이들이 강자들의 도성을 가리켜 “피의 성읍”(3,1)이라고 부르짖고 있을 것입니다. 나훔서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고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 편에 계십니다.

96쪽

 

제가 하바쿡을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장면 때문입니다. 하바쿡은 기다립니다. 그는 ‘보초처럼’, “성벽 위에 자리 잡고서”(2,1) 살펴보겠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보고야 말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물을 찾아 땅을 파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이 나올 때까지 끝없이 땅을 파서 결국 물을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입니다. 일단 한 번 탄원하고 질문을 던졌으면, 대답을 받는 그 순간까지 자리를 깔고 앉아 버팁니다. 물러서지 않습니다.

103쪽

 

하느님의 대답을 들을 때까지 지켜 서서 기다린 하바쿡은, 믿음과 현실의 간격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응답을 얻을 때까지 씨름하기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현실의 어둠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2-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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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안소근 수녀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수녀. 교황청 성서 대학에서 시편 전공, 현재 대전 가톨릭대학교 교수다. 저서로는 《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성경 주해 이사야서》, 《구약 종주》 등이 있고, 역서로는 《아가》(G. Barbiero), 《하늘의 지혜》(M. Gilbert)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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