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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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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생활의 큰 적敵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인 기복 신앙에 빠져 거의 맹목적으로 ‘나’와 ‘내 사람’에만 집착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주변 세계와 이웃은 물론 종교 생활의 마지막 목적이신 하느님마저 어느새 온데간데없게 된다.

일상 생활에 지쳐서, 하느님을 믿는다면서도 결국 자신 속에만 갇혀 있기 쉬운 우리에게 우리 가톨릭 신앙 생활의 중심인 미사를, 우리의 노동과 고통, 우리가 거두어들이는 수고의 ‘열매’와 우리가 쓰라리게 겪어 낼 수밖에 없는 아픔의 ‘액즙’을 담아 땅덩이 전체를 제단 삼아 드리는 미사로 보게 해주는,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매일의 미사를 우주적 차원에서 볼 수 있게 해주는 참신한 시각視角을 얻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의 이 ‘미사 묵상’은 모든 동료 신앙인들과 ‘나눌’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이 책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매일매주 드리는 미사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고, 우리의 미사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새롭게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은이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은 1881년 5월 1일 ‘Clermont-Ferrand’ 근처 ‘Sarcenat’에서 태어났다. 18살 때 예수회에 입회했으며,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카이로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1911년에는 사제품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맞아, 1915년 1월부터 1919년 3월까지는 군 에 들어가, 최일선에서 부상병을 들것에 태워 나르는 업무를 자원하여 수행하였다. 전쟁이 휴전 상태로 돌아감에 따라 제대한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다시 연구에 몰두해 1922년에는 소 르본느에서 자연과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 대학’ Institut catholique de Paris에서 지질학 교수로 활동했다. 1923년에는 학문적 소명을 띠고 중국에 갔으며, 수많은 학문적 탐험을 했고, 중국 지질학 관청의 공적인 자문위원으로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는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에서 일했다. 생애 말년을 그는 뉴욕 에서 지냈다. 1951년부터는 그곳에서 ‘Wenner-Gren Foundation for Anthropological Research’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수많은 학술협회의 명예회원이기도 했다. 1955년 부 활 대축일에 뉴욕에서 사망했다.

 


 

소개의 말씀 ■ 봉헌 ■ 세계 위의 불 ■ 세계 안의 불 ■ 영성체 ■ 기도 옮기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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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은 1881년 5월 1일 ‘Clermont-Ferrand’ 근처 ‘Sarcenat’에서 태어났다. 18살 때 예수회에 입회했으며,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카이로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1911년에는 사제품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맞아, 1915년 1월부터 1919년 3월까지는 군 에 들어가, 최일선에서 부상병을 들것에 태워 나르는 업무를 자원하여 수행하였다. 전쟁이 휴전 상태로 돌아감에 따라 제대한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다시 연구에 몰두해 1922년에는 소 르본느에서 자연과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 대학’ Institut catholique de Paris에서 지질학 교수로 활동했다. 1923년에는 학문적 소명을 띠고 중국에 갔으며, 수많은 학문적 탐험을 했고, 중국 지질학 관청의 공적인 자문위원으로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는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에서 일했다. 생애 말년을 그는 뉴욕 에서 지냈다. 1951년부터는 그곳에서 ‘Wenner-Gren Foundation for Anthropological Research’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수많은 학술협회의 명예회원이기도 했다. 1955년 부 활 대축일에 뉴욕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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